남일은 치국에게 싹싹한 후배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예쁨 받으려 애쓰는 후배들은 피곤할 뿐이었고, 소신대로 행동하는 남일이 더 예뻐 보였다. 치국은 꾸준히 남일을 귀찮게 했다. 각종 모임에 데리고 다니고, 강의 시간에는 남일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가 앉으며 같이 듣자고 졸랐다. 심지어 이름도 가물가물한 선배들 사이에서 밥을 먹자며 남일을 앉혀 놓곤 혼자 먹으면 외로워진다고 핑계를 대기도 했다. 남일은 짜증을 내면서도 치국의 행동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남일이 "선배"라고 부르면 치국은 "후배야"라고 응수하고, 남일이 "형"이라고 부르면 치국은 "남일아"라고 부르며 웃곤 했다.
치국이 남일을 대학가 학생운동에 데려간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남일은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참여하며 부당함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고 싶은 말을 망설임 없이 뱉는 남일의 당당한 모습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은 치국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남일은 치국에게 닮고 싶은 사람, 배우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치국은 점차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동경이 아님을 깨달았다. 남일의 선배로 곁을 내주는 관계를 넘어, 함께 걸을 수 있는 동반자이자 그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치국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남일을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남일의 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남일의 곁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감정을 억눌렀다.
치국은 학생운동 중 체포되는 일을 겪으며 큰 시련을 맞았다. 구속되어 있는 동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까지 겹치며 치국의 삶은 무너졌다. 절망 속에서도 치국을 대신해 자리를 지켜주고, 그의 몫까지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내준 사람은 남일이었다. 남일은 치국이 없는 동안 그의 빈자리를 메우며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치국이 풀려난 후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긴 빚이 치국을 다시 짓눌렀고, 그는 결국 그 빚을 갚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기로 결심했다. 남일과 함께했던 대학 생활도, 학생운동도, 그동안 꿈꿨던 미래도 모두 뒤로 한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일에게 이미 과분한 도움을 받았기에,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치국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떠났다.